9월 중순이 지나갔음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더위 때문에 무더운 추석을 보내게 됐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늘 알던 추석과는 사뭇 달랐지만, 추석이 가족과 이웃의 평안을 바라고 축하하는 날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정겨운 추석. 올해도 어김없이 대명절의 즐거운 분위기에 자연스레 편승했습니다. 작년처럼 전 부쳐서 이웃에게 나누는 활동을 생활복지운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방법도 작년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 부쳐서 이웃에게 나누면, 자연스레 인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이미 알던 사람이면 관계가 더 깊어질 테고, 모르던 사람이라면 새로운 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인사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턴 쉽습니다. 음식 한 번 나누면 길 걷다 이웃을 마주쳤을 때 무시하고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인사하게 됩니다.
인사만 해도 마을이 달라집니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저 사람은 분명 저럴 거야.’ ‘저 사람은 수상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따위의 뜬구름 잡는 억측, 오해, 비난이 줄어듭니다.
설령 인사를 해서 아는 관계가 됐고, 아는 관계가 되다 보니 다툴 일이 많아졌다고 해도 인사 안 하고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미운 정보다 무서운 게 고운 정도 미운 정도 아예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합니다. 누구와 할지 고민했습니다. 전을 부쳐서 나눈다는 일이 단순해 보이지만 품이 많이 듭니다. 담당자와 충분히 관계가 친밀해 활동을 부탁해도 부담 없을 분들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올해는 하모, 사계, 화순에서 하게 됐습니다.
① 하모리 전 나눔
복지관 근처에 살고 계신 이 씨 어르신은 평소 복지관을 자주 이용하십니다. 복지관 이영주 사회복지사가 꾸린 컬러링 북 색칠하는 모임에 함께하고 계셔서, 이영주 선생님 도움 받아 연락을 드렸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아이고, 선생님이 부탁하니깐 내가 딱 올해만 할 거예요.”
복지관 카페에서 어르신과 만나 이야기 나눴습니다. 어떤 전을 만들지, 몇 명에게 줄 것이며 누구에게 줄지 전부 어르신께서 결정한다고 하니 피로감이 몰려오신 듯 보였습니다. 올해만 하고 다음부터는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나마 올해는 해보겠다고 하시니 참 다행입니다.
전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군데 나누면 당연히 좋겠지만, 준비하는 주민 입장에서 부담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한’ 날, ‘특별한’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 “후원하겠다, 봉사하겠다.”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원과 봉사 활동은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진짜’ 이웃으로 만나기에 한계가 있을 뿐입니다. 이 활동은 봉사자로 이웃을 만나는 게 아니라, 진짜 이웃으로 만나게 돕는 일이니, 준비하는 주민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내키는 대로 합니다.
재료는 전날에 장을 본 다음 어르신께서 미리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전을 부치는 당일에는 이 씨 어르신 지인인 덕 어르신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난 이제 이런 거 안 해요. 자식이나 손주들이 하지. 되게 오랜만에 하는 거야.”
덕 어르신께서는 추석에 전 부치는 역할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되셨다고 합니다. 이 씨 어르신 권유 덕에 다시 뒤집개를 잡게 되셨습니다.
“너는 공주야. 공주. 예쁘게 자라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해봤어.”
이 씨 어르신께서 덕 어르신더러 공주라고 칭하며 귀하게 자라서 이것저것 안 해봤다고 농담을 던지셨습니다. 덕 어르신께서 농담을 듣고 깔깔깔 웃으십니다. 함께하는 지인이 있으니 꽤 즐겁고 정겹습니다.
여러 이야기 나누면서 만들다 보니 어느새 전이 완성됐습니다. 전을 누구에게 드리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몇 명 있어요. 우리 아랫집 부동산도 줘야 하고, 옆에 사무실에도 가져다줘야 하고, 오일장에도 내가 자주 가는 집이 있어서 거기도 하나 주자. 가만있어봐. 아! 텃밭 가꾸면서 우리 집에 가져다주던 아저씨가 있어요. 잘됐네~ 거기도 가져다주자.”
평소 알고 지내던 분도 있고, 처음 만나 인사하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좋은 일로 다가가니 분명 웃으면서 받아주실 겁니다. 나누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당당하고 좋습니다.
“옆집에서 왔어요. 평소 길거리 지나가면서 몇 번 보긴 했는데, 인사도 못 하고 그냥 지나쳤네. 추석이라서 만들어 봤어요. 힘들어서 많이는 못 만들었고, 사무실 직원들이랑 맛만 좀 보면 좋겠어요.”
“윗집에서 왔어요. 추석이라서~ 이거 좀 만들어봤어요. 맛 좀 봐봐요.”
“삼촌! 잠깐 문 좀 열어봐요. 추석이라 잡숴보시라고 전 좀 부쳐봤어요.”
만난 모든 분이 다 반가워하셨고, 감사해하셨습니다.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셨고 잘 먹겠다고, 그냥 가지 말고 잠깐 와서 앉으라고 차라도 마시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박하고 정겨웠습니다. 대단한 선물을 마련해 드리는 게 아니라 소박하게 만들어서 드렸기 때문에 주는 입장에서나 받는 입장에서나 서로 부담이 덜합니다. 이 일로 이 씨 어르신 주변 관계가 조금 더 깊고 좋아졌을 겁니다. 전 부치는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가벼운 수준에서 자발적으로 이웃들과 나누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거면 족합니다.
② 사계리 전 나눔
사계에서의 활동은 복지관 이웃 동아리 지원 사업으로 만나고 있는 ‘고운마음발걸음’ 동아리와 함께했습니다. 이 씨 어르신을 소개해 줬던 이영주 사회복지사처럼 고운마음발걸음 동아리 지원을 담당하는 김민석 사회복지사 도움을 받아 함께 활동했습니다.
활동 전날 김민석 선생님께서 동아리 회원분들과 함께 장을 보고 전 나눔 준비를 도왔습니다. 전을 부칠 장소는 동아리 회원 가운데 곧 개업을 앞둔 회원의 가게에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선뜻 자기 것을 내어준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마음으로 흔쾌히 활동 장소를 내어주시는 회원 덕분에 의미 있게 활동했습니다.활동 당일, 김민석 선생님과 함께 가게로 갔습니다. ‘고운마음발걸음’ 동아리와는 관계가 깊지 않아 회원분들과 잘 알고 지내는 김민석 선생님 덕을 좀 봐야 했습니다. 혼자 있었다면 어느 분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거들어야 할지 몰라 애먹을 뻔했지만, 김민석 선생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회원분들도 저를 편하게 대했습니다.
회원분들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개시하셨습니다. 한쪽에서는 동그랑땡을, 다른 한쪽에서는 산적과 동태전을 각각 나눠 부쳤습니다. 역할을 나누니 일이 척척 진행됩니다. 예상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조리를 마쳤습니다.
회원분들은 거침없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관계가 아니라면 조금은 낯가림이 있을 법한데, ‘돌격 앞으로!’ 기운으로 성큼성큼 이웃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새로 개업한 카페나 소품 가게, 식당, 마을 어르신 댁을 들러 푸짐하게 만든 전을 드리고 인사 나눴습니다.다들 웃는 얼굴로 반겨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하는 반응을 보이셨지만 하는 일을 설명하니 이해하시고 너무 좋은 취지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 이게 뭐예요? 아! 추석이라서? 세상에… 너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냥 가지 마시고 이거라도 챙겨가세요!”
인사하기 위해 찾아갔던 브런치 카페에서는 사장님이 보답으로 딸기 요거트를 다섯 개나 챙겨주셨습니다. 4,500원짜리 요거트였는데, 다섯 개면 22,500원입니다. 맛보라고 건넨 전보다도 더 값비싼 보답을 받은 겁니다. 이웃과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면 마음을 열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정겹고 소박하고, 감사한 이웃들을 만났습니다.③ 화순리 전 나눔
화순에 살고 계신 정 선생님께 전 나눔 활동을 제안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고운마음발걸음’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몬딱어울림오카리나’ 동아리로 복지관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카리나 동아리는 작년에도 전 나눔 활동을 했었습니다. 동아리 회장직을 오래 맡아온 이 선생님 댁에서 활동을 했었고, 올해는 정 선생님 댁이나 정 선생님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고민 끝에 이 선생님 댁에서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꼭 화순에서 해야 해? 우리가 봉사하는 건데, 옆 동네 덕수리에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아니야, 이거 봉사가 아니라. 이웃 관계 살리기야. 내 옆집, 뒷집이랑 나누는 거.”
이 선생님께서 전 나눔 활동을 봉사로 생각하시고 덕수리에 나눠도 되지 않겠느냐 물었지만 정 선생님께서 활동 취지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셨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활동 취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셔서 놀라우면서도 감사했습니다.
“하긴 나도 작년에 우리 집 근처 이웃한테 나누긴 했지.”
이 선생님께서도 작년 활동을 떠올리며 활동의 취지를 다시 이해하셨습니다.
전 부치기에 필요한 재료는 당일 아침에 장 봤습니다. 전 부치기는 예전부터 계속 해 오셨던 일이고, 복지관의 전 나눔 활동도 작년에 해보셨으니 재료 구매가 순식간에 이뤄졌습니다.
곧바로 이 선생님 댁으로 이동해서 준비했습니다. 저는 옆에서 멀뚱멀뚱 있었습니다. 가끔 손이 필요한 곳에 가 잡일을 도왔습니다. 역시 음식은 만들면서 조금씩 맛을 봐야지요. 몇 개 먹어보라며 제게 건네주셨습니다. 전 그 자체도 굉장히 맛이 좋은데 점심을 먹기 이전이라 허기까지 져서 정말 맛있었습니다.
이 선생님 댁에 정 선생님을 포함해 오카리나 동아리 회원분들, 정 선생님과 함께 화순리 문화마을에 거주하는 이웃 한 분이 오셔서 도우셨습니다. 다 같이 전 맛있게 만들고 점심까지 먹으니 이 자체로도 참 정겹다 싶었습니다.
정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이웃들이 대부분 일을 하고 계셔서 퇴근하고 집에 오는 5시 이후에 나누기 시작해야 좋다고 하셨습니다. 전을 시원하게 보관해 둔 뒤 시간 맞춰 정 선생님 댁 앞에서 만났습니다. 함께 전 부치기를 도와주셨던 문화마을 이웃 주민분과 함께 집마다 다니며 전을 나눴습니다.
집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길가를 걷다가 만나는 이웃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다들 뜻밖의 선물에 반색을 표하셨습니다.
“저 저기 아래 블록 담 꾸며놓은 집에 살아요. 추석이라서 만들어봤어요~ 앞으로 인사하면서 지내요.”
“아~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아이고,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 인사드릴게요. 하하.”
마을이 크지 않다 보니 어느 쪽에 살고 있는 이웃이라고 소개하면 대부분 다 알아들으셨습니다. 소소한 이웃 관계가 어울리는 마을이라 생각했습니다. 정 선생님과 생활복지운동하길 잘 했다 생각했습니다.
올해 전 나눔 활동도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미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나눔 활동의 경험이 활동을 주도했던 주민이나 마을 이웃들에게 유의미한 경험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점점 없어져 가는 공동체,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팽배한 개인주의와 붕괴된 공동체 문제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향수가 커지겠지요. 작은 불씨만 일으켜도 불이 붙을 수 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일, 나누는 일. 어색하고 낯선 일이 아닙니다. 인간(人間) 본연의 모습입니다. 인사하는 문화가 마을에 조금씩 생겨나길 바랍니다.